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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8.06.25 엔드 타임 : 아카온 中 마지막 장 -6-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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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Volume 5 Archaon


말레키스는 어떻게든 발버둥쳤지만,

그의 아작난 두 다리짝은 거대한 바윗덩어리 아래 제대로 깔려 있었습니다.

고통은 당연히 어마어마했지만,

영혼에서 느껴지는 공허함에 비하면 사실 아무것도 아니였지요.

균열은 그에게서 울구의 마법풍만을 앗아간게 아니라,

그가 물려받았었던 모든 마법들까지 다 앗아가버렸고

덕분에 남겨진 것이라곤 아가리를 벌리고 있는 텅 빈 공허함 뿐이였습니다.

오랜 세월간 처음으로, 말레키스는 완전한 무력함을 느꼈습니다.


그러는 순간에도, 의식의 방 중앙에서 균열은 불길하게 빛을 발하고 있었습니다.

그 와중에 말레키스는 저 멀리서 붕괴되어가고 있는 나가쉬의 형상을 운 좋게 발견할 수 있었지요.

고대의 리치의 텅 빈 동공들에서 발하는 흐릿한 마녀의 화염들은 으스스한 눈길 아래 공허를 바라보는 듯 보였습니다.

그의 마법 또한 그에게서 완전히 뜯겨나갔을까요?

말레키스는 문득 궁금함을 느꼇습니다.

가장 위대하고 강력한 네크로맨서 나가쉬조차 아마 수천년만에 처음으로 절망을 느끼고 있지는 않을까요?

그런 잡생각이 머리속에 떠오르자 고통 속에도 불구하고, 말레키스는 잠깐이나마 피식 미소지을 수 있었습니다.


알라리엘은 아무 말이나 표정 없이 말레키스 왼쪽에 우두커니 서 있었습니다.

심지어 지금까지도, 영원의 왕은 어째서 자신이 이런 자를 구하기 위해 몸을 내던졌는가에 대해 감조차 잡지 못하고 있었지요.

어쩌면, 그가 예전에 으레 말해왔듯이,

배반자 말레키스의 이타적 행위가 세계의 멸망을 알리는 징조라 그런 건지도요.

그런 쓸데없는 생각 속에, 말레키스는 간만에 시원하게 웃었습니다.

모든 것들의 멸망 마지막 전에 남기는 최후의 농담따먹기라니.


말레키스의 웃음은 티리온이 갑자기 그의 눈 앞에 모습을 드러내며 뚝 끊겼습니다.

왕자의 얼굴은 이전 전투에서 묻은 피들로 범벅이 되어 있었고,

갑주에는 만빡이가 타버리며 남긴 그을음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지요.

아무 말 없이, 심지어는 서로간에 눈길 교환 한 번 없이,

티리온은 알라리엘과 말레키스 사이에 끼어든다음, 

바윗덩어리에 두 다리짝이 깔린 말레키스 옆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리고선, 자신의 찢긴 망토 일부를 찢어내고서

아무 말 없이, 그 두꺼운 망토 조각들을 접어 묶은 다음,

그것을 에버퀸의 머리 아래 두었습니다.


'참 감동적이구만,' 말레키스가 비꼬았습니다.


'여기서 난 보이지도 않는가보지?'


허나 그가 말하는 와중에, 두 다리를 깔아뭉게고 있었던 파편은 이미 옮겨지고 있었습니다.

말레키스는 옮겨지고 있는 바위가 부셔진 뼈들을 또 서로 마찰시켜가며 부시고 있는 탓에 극악한 고통 속에 뻣뻣하게 굳었지요.

그제서야 티리엘은 말레키스를 향해 고개를 돌렸습니다.


'지금 네놈이 죽길 원하고 있다면, 내가 그건 기꺼히 이루어주마.' 왕자가 답했습니다.

그의 음성은 딱히 분노가 서려 있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자비가 있는 것도 아니였지요.


'난 이 세계를 7천년간 걸어온 몸이다,' 목소리에서 느껴질 정도로, 뼈가 갈리는 고통을 참아내면서 말레키스가 중얼거렸습니다.


'정말로 끝날 때까진 악착같이 버틸꺼다.'


균열은 이제 '세라폰'의 시체까지 닿고 있었습니다.

전능한 드래곤의 비늘들과 힘줄들까지모두 먼지 속에 터져 사라지기 시작했고,

이윽고 희미한 액화 방울들이 되어 빨려들어갔지요.

그 가루들은 잠깐이나마 빛나는 균열 위를 떠돌다가,

이내 그 심연 속에 빨려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그 순간 알라리엘의 두 눈꺼풀이 잠깐 떨렸습니다.

의식적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에버퀸은 짧게 한탄했지요.


말레키스가 능글맞게 웃으며 말했습니다.


'넌 도망갈 수 있을거다,'


'그녀를 데리고 떠나라. 네 말인 말한디르는 충분히 빨라.

어쩌면 이 멸망을 피해서 어디론가 피할 수도 있겠지.'


'갈 수 있다는 말이냐?' 티리온이 음울하게 답했습니다.


'이건 라나 단트라다. 모든 것들의 멸망.

피할 수 있는 은신처 다윈 어디에도 없는거다.'


'멍청하긴,' 말레키스가 쏘아붙였습니다.


'내가 네놈 자리에 있었더라면, 심장 박동 한번 뛰기도 전에 난 바로 이 자리를 떠났을거다.'


'아니, 넌 그러지 않았을거야.'


'왜? 나 같은 정서를 지닌 자에겐 동맹의 곁에서 최후를 맞이한다는 것 따위는 너무 고귀한 일이라고.'


'그렇긴 하지,' 알라리엘이 갑자기 입을 열었습니다.

그건 간신히 꺼낸 말이였지요. 그녀의 힘없이 창백해진 얼굴에 드러나듯이.


'당신이라면 여기 남아 균열의 힘을 취하려 했을지도 모르는 일이야.'


말레키스는 에버퀸을 찡그리며 노려봤지만, 딱히 별다른 말은 꺼내지 않았습니다.


'우린 모두 느낄 수 있어.' 에버퀸이 이어 말했습니다.


'이와 같은 힘이라면, 우리가 생각했던 새로운 세상을 창조했을 수도 있었겠지.

릴리아스가 그걸 이해했더라면, 이 모든 것들이 무엇으로든 대체되었을지도 모르는 일이야.'


티리온은 알라리엘을 부축했습니다.

왕자와 에버퀸은 이제 말레키스에게서 등을 돌려 균열 쪽으로 시선을 돌렸지요.

머리 위에선, 지하 천장을 부축하던 마지막으로 남은 조각들이 불길한 소리를 내며 갈라지고 있었습니다.

그때 알라리엘은 다시 말레키스를 향해 시선을 돌렸습니다. 그리고는, 이번에는 목소리에 제법 힘이 실린 채로 입을 열었지요.


'그건 당신이 다룰 수 없는 힘이야. 우리의 기회는 여기서 끝났고, 우리의 시대도 여기서 끝이야.'


균열이 이제는 코앞까지 다가왔습니다.

알라리엘은 말레키스에게 시선을 거둔 다음 다시 앞을 바라보며, 두 손으로 티리온의 건틀렛 씌워진 한 손을 꼭 잡았습니다.

마지막 순간, 균열의 요동치는 어둠 앞에 왕자와 에버퀸이 실루엣마냥 흐릿하게 비추다가,

이내 어둠 속에 사라졌습니다.


그 안에서 공기는 동시에 불탈 정도로 뜨겁기도 하고 얼어붙을 정도로 차갑기도 했습니다.

말레키스는 그의 머리 속에 악마의 목소리들이 들려오며,

남은 이성 조각을 깎아내리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마침내 균열의 물결이 말레키스까지도 도달했습니다.

그리고는, 깊고 헤칠 수 없는 어둠이 마침내 그까지도 삼켰지요.


사악한 웃음소리가 말레키스 주변을 떠돌았습니다.

과거의 추억들이 그의 두 눈가 앞에서 마치 유령처럼 어른거렸습니다.

아버지의 냉담함, 어머니의 잔혹한 사랑에 대한 기억들.

그 단 한순간에, 그는 모든 배반, 사악한 행위들, 그리고 실패들을 떠올릴 수 있었습니다.


최후가 다가왔습니다.

마치 칼에 잘리듯, 모든 기억들이 지워졌습니다.

말레키스였던 존재는 잠시 패닉에 휩싸였습니다. 이제는 자신의 이름조차 상기할 수 없었기에.


웃음 소리조차도 사라졌습니다.

그리고는 영원한 암흑만이 남았습니다. 

Posted by 스틸리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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